달빛아래

아버지와 아들..

달빛.. 2006. 9. 3. 10:52
      아버지와 아들..
      "링거라도 맞혀 드려야 기운이 나시지 않겠어요?"
      문득, 귓전에 맴도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서글퍼져 나도 모르게 그만 얼굴을 찡그렸다.
      길 위로 날쌔게 스치는 바람이 고여있는 빗물을 밀어내고 있었다.
      아버지의 연약한 모습에 그녀는 공연한 짜증을 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의사를 바라보며 아버님에 대한 연민으로 내 눈도 어느새 젖어들었다.
      벗겨진 무릎 위로 피가 맺힌 다리를 들어 보이는 아버님은 기운이 없어서인지 사시나무 떨듯 떨고 계셨다.
      "아버님.." 수줍은 새색시 조심스럽게 시아버님을 불렀다.
      "..."
      대답도 없이 차갑게 고개만 돌려 며느리를 바라보시는 시아버님의 날카로운 눈빛에 놀라 그만 입은 다물어지고 아무 말도 못하고 말았다.
      강력계 형사출신에 오랜 세월 법원근무로 인한 탓인지 모든 사람을 죄인 다루듯 대하시는 시아버님은 참으로 차갑고 냉정하신 분이었다.
      심지어 자식들까지도 아버지가 무서워서 제대로 말을 못 붙일 정도면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는 말이 내게는 무색할 정도로 외며느리임에도 따뜻한 말 한마디 들어본 기억이 없는 젊은 날들을 더듬으며 떨고 있는 아버님의 손이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한층 더 해 줬다.
      기운이 없어 하나밖에 없는 친손자의 생일에도 처음으로 불참하셨던 아버님이 비 오는 날, 밖으로 나가셨다가 빗길에 넘어지셔서 다치셨단다.
      전화선을 타고 흘러오는 목소리가 아무래도 많이 편찮으신 것 같아 정신없이 달려갔더니 역시 잘 움직이시지도 못하고 다리는 피부가 벗겨진 채로 피가 맺혀있었다.
      여기저기 멍든 자국을 보며 어떻게 넘어지셨기에 온몸이 저렇게 되셨나, 하필 빗길에 왜 나가셨나.. 속이 상했다.
      "입맛 나는 약이라도 처방해 주세요!"
      온 김에 기운 나는 링거라도 맞혀달라는 우리의 요구에 혈액검사 결과가 나와야 입원을 하든지 간호병동으로 가든지 링거를 맞든지 한다는 의사의 말에 딸이나 며느리나 같은 마음이 되어서 공연히 의사에게 투정을 하고 심술을 부렸다.
      힘이 없어 흔들흔들하시는 아버님을 붙잡아 드리려고 하니 괜찮다고 슬그머니 팔을 빼신다.
      대쪽 같던 평소의 아버님 성격에 그러고도 남는 분이시다.
      병원에도 안 오겠다고 하시는 것을 시누이를 대동해 억지로 모셔왔으니 당신의 연약해짐에 자존심이 상하셨나 보다.
      설렁탕집에서 만나기로 한 아들을 두리번거리며 찾으신다.
      "어떻대?"
      묻는 남편의 얼굴과 아버님을 번갈아 바라봤다.
      아버님은 아들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시지도 못한다.
      어린 꼬마가 아버지의 벼락같은 호통이 무서워서 군소리도 못했었다.
      뜨거운 욕조에도 싫다 소리 한번 못하고 꼼짝없이 들어가야 했고 남자는 몸이 튼튼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주장에 한 겨울에 얼음 위에서 줄넘기를 해야 했고 더운 여름날에도 빠짐없이 아버지를 따라 등산을 가야만 했었다.
      매가 무서워서 억지로 참아야 했던 어린 날들의 아픈 기억이 한때는 아버지를 미워하게도 했지만 남편은 이제 연로하신 아버지를 바라보며 많이 애틋해한다.
      "더 드세요.."
      슬그머니 아버지 앞으로 밀어드리는 반찬 그릇에 아들의 사랑이 담겨간다.
      9-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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