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와 아들..
- "링거라도 맞혀 드려야 기운이 나시지 않겠어요?"
- 문득, 귓전에 맴도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서글퍼져 나도 모르게 그만 얼굴을 찡그렸다.
- 길 위로 날쌔게 스치는 바람이 고여있는 빗물을 밀어내고 있었다.
- 아버지의 연약한 모습에 그녀는 공연한 짜증을 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의사를 바라보며 아버님에 대한 연민으로 내 눈도 어느새 젖어들었다.
- 벗겨진 무릎 위로 피가 맺힌 다리를 들어 보이는 아버님은 기운이 없어서인지 사시나무 떨듯 떨고 계셨다.
- "아버님.." 수줍은 새색시 조심스럽게 시아버님을 불렀다.
- "..."
- 대답도 없이 차갑게 고개만 돌려 며느리를 바라보시는 시아버님의 날카로운 눈빛에 놀라 그만 입은 다물어지고 아무 말도 못하고 말았다.
- 강력계 형사출신에 오랜 세월 법원근무로 인한 탓인지 모든 사람을 죄인 다루듯 대하시는 시아버님은 참으로 차갑고 냉정하신 분이었다.
- 심지어 자식들까지도 아버지가 무서워서 제대로 말을 못 붙일 정도면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는 말이 내게는 무색할 정도로 외며느리임에도 따뜻한 말 한마디 들어본 기억이 없는 젊은 날들을 더듬으며 떨고 있는 아버님의 손이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한층 더 해 줬다.
- 기운이 없어 하나밖에 없는 친손자의 생일에도 처음으로 불참하셨던 아버님이 비 오는 날, 밖으로 나가셨다가 빗길에 넘어지셔서 다치셨단다.
- 전화선을 타고 흘러오는 목소리가 아무래도 많이 편찮으신 것 같아 정신없이 달려갔더니 역시 잘 움직이시지도 못하고 다리는 피부가 벗겨진 채로 피가 맺혀있었다.
- 여기저기 멍든 자국을 보며 어떻게 넘어지셨기에 온몸이 저렇게 되셨나, 하필 빗길에 왜 나가셨나.. 속이 상했다.
- "입맛 나는 약이라도 처방해 주세요!"
- 온 김에 기운 나는 링거라도 맞혀달라는 우리의 요구에 혈액검사 결과가 나와야 입원을 하든지 간호병동으로 가든지 링거를 맞든지 한다는 의사의 말에 딸이나 며느리나 같은 마음이 되어서 공연히 의사에게 투정을 하고 심술을 부렸다.
- 힘이 없어 흔들흔들하시는 아버님을 붙잡아 드리려고 하니 괜찮다고 슬그머니 팔을 빼신다.
- 대쪽 같던 평소의 아버님 성격에 그러고도 남는 분이시다.
- 병원에도 안 오겠다고 하시는 것을 시누이를 대동해 억지로 모셔왔으니 당신의 연약해짐에 자존심이 상하셨나 보다.
- 설렁탕집에서 만나기로 한 아들을 두리번거리며 찾으신다.
- "어떻대?"
- 묻는 남편의 얼굴과 아버님을 번갈아 바라봤다.
- 아버님은 아들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시지도 못한다.
- 어린 꼬마가 아버지의 벼락같은 호통이 무서워서 군소리도 못했었다.
- 뜨거운 욕조에도 싫다 소리 한번 못하고 꼼짝없이 들어가야 했고 남자는 몸이 튼튼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주장에 한 겨울에 얼음 위에서 줄넘기를 해야 했고 더운 여름날에도 빠짐없이 아버지를 따라 등산을 가야만 했었다.
- 매가 무서워서 억지로 참아야 했던 어린 날들의 아픈 기억이 한때는 아버지를 미워하게도 했지만 남편은 이제 연로하신 아버지를 바라보며 많이 애틋해한다.
- "더 드세요.."
- 슬그머니 아버지 앞으로 밀어드리는 반찬 그릇에 아들의 사랑이 담겨간다.
- 9-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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