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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그늘에 마음 베인다 .. 이기철

2005.10.20 08:37 산 그늘에 마음 베인다 .. 이기철 햇빛과 그늘 사이로 오늘 하루도 지나왔다 일찍 저무는 날일수록 산그늘에 마음 베인다 손 헤도 별은 내려오지 않고 언덕을 넘어가지 못하는 나무들만 내 곁에 서 있다 가꾼 삶이 진흙이 되기에는  저녁놀이 너무 아름답다 매만져 고통이 반짝이는 날은 손수건만한 꿈을 헹구어 햇빛에 널고 덕석 편 자리만큼 희망도 펴놓는다 바람 부는 날은 내 하루도 숨가빠 꿈 혼자 나부끼는 이 쓸쓸함 풀뿌리가 다칠까 봐 흙도 골라 딛는 이 고요함 어느 날 내 눈물 따뜻해지는 날 오면 나는 내 일생 써온 말씨로 편지를 쓰고 이름 부르면 어디든 그 자리에 서서 나를 기다릴 사람 만나러 가리라 써도써도 미진한 시처럼 가도가도 닿지 못한 햇볕 같은 그리움 풀잎만이 꿈의 빛깔..

다른 2025.04.01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 김용택 이별은 손 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벚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 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 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 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다른 2009.05.14

공존의 이유

공존의 이유                           - 조병화                     깊이 사귀지 마세.작별이 잦은 우리들의 생애,가벼운 정도로 사귀세. 악수가 서로 짐이 되면작별을 하세. 어려운 말로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세. 너만이라든지우리만이라든지,이것은 비밀일세라든지같은말들을하지 않기로 하세. 내가 너를 생각하는 깊이를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나를 깊이 생각하는 깊이를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내가 어디메쯤 간다는 것을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작별이 올 때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사귀세. 작별을 하며,작별을 하며 사세. 작별이 오면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악수를 하세.

다른 2008.01.03

그리움..

그리움                                거리만이                             그리움을 낳는 건 아니다.                             아무리 네가 가까이 있어도                             너는 충분히, 실컷 가깝지 않았었다.                              더욱 더욱 가깝게 거리만이 아니라                             모든 게 의식까지도 가깝게 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움은.                                                                              -  전혜린

다른 2007.12.16

슬픔으로 가는 길 / 정호승

슬픔으로 가는 길 / 정호승    낯선 새 한 마리 길 끝으로 사라지고길가에 핀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내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슬픔으로 걸어가는 들길을 걸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하나슬픔을 앞세우고 내 앞을 지나가고  어디선가 갈나무 지는 잎새 하나 슬픔을 버리고 나를 따른다내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끝없이 걸어가다 뒤돌아보면  인생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저녁놀에 파묻히고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다른 2007.12.02

인연(因緣) - 피천득

인연(因緣) - 피천득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여자 대학에 가보고 싶었다. 그 학교에 어느 가을 학기, 매주 한 번씩 출강한 일이 있다. 힘드는 출강을 한 학기 하게 된 것은, 주수녀님과 김수녀님이 내 집에 오신 것에 대한 예의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수십 년 전 내가 열일곱 되던 봄, 나는 처음 동경(東京)에 간 일이 있다. 어떤 분의 소개로 사회 교육가 미우라(三浦) 선생 댁에 유숙을 하게 되었다. 시바꾸 시로가네(芝區白金)에 있는 그 집에는 주인 내외와 어린 딸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하녀도 서생도 없었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하는 아사코(朝子)는 처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랐다. 아침에 낳았다고 아사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하였다. 그 집 ..

다른 2007.07.05

어머니의 빨래터..

어머니의 빨래터  열두발 상모를 휘감은 우리 동네 강가에는어머니의 빨래터가 있었다찔레가시 같은 할머니의 눈매, 등살 찌를 때면어머니는어머니의 빨래터로 가셨다보리타작 먼지처럼아버지의 사랑이 흩어졌을 때에도어김없이 어머니는어머니의 빨래터로 가셨다어머니는어머니의 빨래터에서찔레가시 같은 할머니 눈매를 짜 내셨고먼지 같이 흩어진 아버지의 사랑을 돌돌 말으셨다  열두발 상모같이 휘감은 우리 동네 강가에는슬픔을 씻는, 외로움을 띄워 보내는어머니의 빨래터가 있었다하얀 빨래대신사랑을 담았던 어머니의 빨래터가 있었다                                           - 향기나는 시인들의 5인시집

다른 2007.03.24

문 밖에는 봄..

문 밖에는 봄                                                       -유행두 (2007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자)  지구 끝에서 아내가 붕어빵을 굽고 있다.파닥거리는 지느러미에서 비늘이 떨어진다.지구를 한참이나 돌다 온 듯한.  퇴계 선생 지폐 위에 가볍게 흩어진다.산달 아내, 배가 부푼다.중환자실. 어머니는 링거병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한 알씩 세고 계신다.끼니 때마다 가는 호스 타고 내려가는 미음. 포르말린 먼지 반짝.  휠체어 힐끔 훔쳐보신다.저녁마다 어둠이 먼저 눕던 달셋방.도란도란 웃음을 젓가락질하던 밥상에서 어머니와 아내가 번갈아 등을 토닥거리고몇 개월 전 신문처럼 할 일 잃고 누운 내 옆에서 아내는 낮은 기도 소리를 쥐어준다.가끔씩 지구는 벌떡벌..

다른 2007.02.09

내가 길이 되어 당신께로..

내가 길이 되어 당신께로                                 - 이정하 길은 내게 일렀다, 이제 그만 돌아가라고.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걸어왔노라고. 길 위에 서면 나는 서러웠다. 갈 수도, 안 갈수도 없는 길이었으므로. 돌아가자니 너무 많이 걸어왔고,  계속가자니 내가 이 길을 왜 가는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가는지 가늠이 잘 되지 않는다. 허무와 슬픔이라는 장애물, 나는 그것들과 싸우며 비틀거리며 길을 간다. 그대라는 이정표, 나는 더듬거리며 길을 간다.

다른 2006.12.15

낙화..

낙화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이형기 -

다른 2006.06.22